당신이 몰랐던 중국의 외교 전략






삼국지(三國演義)에 유비의 도회지계(韜晦之計)에 대한 대목이 나온다. 도(韜)는 칼집을 의미하며, 회(晦)는 그믐달, 혹은 감춘다는 의미이다. 도회(韜晦)는 ‘자신의 지위, 재능, 본심을 감추는 것’을 말한다.

유비의 세력이 커지자, 조조는 유비를 초대해 그의 본심을 떠 보기로 한다.

“천하에 두 영웅이 있는데, 나와 그대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조조의 질문에 답하려는 순간, 하늘에서 천둥이 치면서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유비는 천둥 소리에 놀라며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이 모습을 본 조조가 유비에게 묻는다.

“대장부가 어찌 천둥을 두려워 하는가?”

유비는 벌벌 떨면서 말했다.

“천둥이 치면 세상에 변고가 생긴다는 건데,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이를 본 조조는 유비의 인물 됨을 낮게 보고 의심을 거두었다.
물론, 유비는 조조에게 자신의 본심과 재능을 감추는 “도회지계(韜晦之計)”를 쓴 것이다.



마오쩌둥의 외교 정책


중국에 공산당 정권을 수립한 마오쩌둥의 50년대 외교 전략의 기본은 “친소(親蘇) 일변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중국은 비루하고 보잘 것 없었고, 국제 사회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으며, 국공내전(国共内战)에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국민당을 지원한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미국이 중국을 침공할까 봐 떨고 있었다. 그러니 같은 공산주의 정권인 소련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냉전이 깊어지면서 미소(美蘇)간 대립이 심화되자 마오쩌둥은 제갈공명의 “천하삼분론(天下三分論)”을 차용하여 이른바 중간지대론을 펼치기 시작한다.

천하삼분론은 북쪽의 조조의 위, 동쪽의 손권의 오의 틈새에서 삼국이 정립(鼎立)하는 형세를 구축하여 유비의 촉한을 지킨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변형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은, 북경에 체류하며 중국과 소련의 공산주의를 심층 취재하던 미국인 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Anna Louise Strong)과의 인터뷰에서 최초로 중간지대론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Anna Louise Strong



중간지대론은 이후 “천하 3분론”과 “제 3세계론”으로 진화 되었는데, 천하 3분론이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와, 소련 및 그 위성국가의 세계가 있고, 이 둘을 제외한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별도의 제 3세계가 있다는 것이며, 제 3세계론은, 중국은 강대국이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제 3세계 후진국 국가의 하나라고 자처하는 것이었다. 기실, 제 3세계론은 중국을 제 3세계 속에 감추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숨은 속내는 초영간미(超英赶美)이었다. 즉, 영국을 초월하고 미국과 겨룬다는 것이다.

초영간미의 세계전략 속에서 중국 인구의 90%에 해당하는 농민을 공업화에 동원하는 대약진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철저하게 실패하여 결국 경제는 수렁에 빠지고, 수많은 인민들이 굶어 죽게 되었다. 결국 마오쩌둥의 권력에 위기가 발생하자, 이번에는 ‘문화대혁명’을 벌여 10대 중고등학생을 동원하여 정적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1978년 말,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초영간미 전략을 폐기하고, 화평발전(和平發展)을 기치로 내세웠다. 즉, "평화적으로 경제 발전에만 힘을 쏟겠다"는 의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덩샤오핑은 중국을 미국에 대적할만한 강대국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덩샤오핑의 외교 정책






소련이 흔들리던 91년 8월경, 당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추진하며 개방개혁 정책을 추진한 소련의 고르바쵸프 대통령에 맞서 소련 공산당 보수파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8월 쿠데타”이며, 불과 이틀 만에 실패했지만, 이 사건은 소련의 붕괴를 가져다 준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소련의 최초이자 마지막 부통령이었던 겐나디 야나예프(Геннадий Ива́нович Янаев)도 쿠데타에 가담했다.

소련에 쿠데타가 발생하자, 중국 공산당 일부 간부들이 야나예프의 쿠데타를 지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혔다. 이 때 덩사오핑은 “韜光養晦(도광양회)”로 응수했다. 도광양회는 유비의 도회지계(韜晦之計)를 차용한 것이다.

도광(韜光)은 칼집에 칼을 넣어 빛을 감춘다는 뜻이며, 양회(養晦)는 그믐달 속에 몸을 감추고 실력을 기른다는 뜻이다. 마오쩌둥의 제 3세계론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덩샤오핑의 외교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덩샤오핑은 92년 경 중국의 외교안보 기관에 이른바 “24자 전략”을 외교 전략 지침으로 남겼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冷靜觀察(냉정관찰), 站穩脚筋(참온각근), 沈着應付(침착응부)
韜光養晦(도광양회), 善于守拙(선우수졸), 絶不當頭(절부당두)

냉정관찰(靜觀察 : 냉정하게 관찰하고), 참온각근(站穩脚筋 :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하며), 침착응부(沈着應付 : 침착하게 대응하고), 도광양회(韜光養晦 : 자신의 능력을 노출하지 않으며 실력을 기르고), 선우수졸(善于守拙 : 교묘하게 세태에 영합하지 않고 우직함을 지키며), 절부당두(絶不當頭 : 결코 우두머리로 나서지 않는다)


덩샤오핑의 또 다른 외교 전략은 “반패권주의(反覇權主義)”라고 할 수 있다.




상하이 코뮈니케와 중국의 반패권주의(反覇權主義)



패권이란 무력이나 경제력으로 다른 나라를 압박하고 세력을 넓히는 것을 말한다. 패권(覇權)이란 단어가 국제 외교사에 처음 사용된 것은 1968년이다.

프라하의 봄(체코 민주화 운동)을 응징하기 위해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자, 신화사(新華社. 중국의 통신사)는 이를 비난하는 기사에 패권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어 1972년 미중(美中)간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이 성명서 안에는 영문 hegemony가 모두 3 번 사용되었고, 중국은 이를 패권(覇權)으로 번역하였다.

상하이 코뮈니케(Shanghai Communiqué)로 불리는 이 성명서는 중국 상하이 금강 대반점(锦江酒店. Jinjiang Hotel )에서 72년 2월 27일 발표되었으며, 미소 양극체제가 다극체제로 변환되는 세계사의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锦江酒店. Jinjiang Hotel


당시 닉슨 대통령은 소련을 견제하고 베트남 전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국의 협조가 필요했고, 중국은 일본의 군국주의를 견제할 필요도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69년 아무르 강(흑룡강)의 지류인 우수리 강의 영유권 문제를 놓고 소련과 분쟁을 일으켰으며, 군사 충돌까지 발발했다. 중소(中蘇) 대립이 본격화, 현실화된 것이다. 결국 중국은 적(소련)의 적(미국)과 동침을 원한 것이다.

이 같은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공동성명이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미국의 노력이 극진했다. 닉스 대통령은 무려 8일간이나 중국에 체류하면서 마오쩌둥과 한 번, 저우언라이와 여섯 차례 회담했고, 안보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닉슨의 방중 전에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했다.






회담 합의문은 7 차례나 수정을 거듭해 발표되었다. 이 합의문에는 미중(美中) 간의 관계뿐 아니라, 당시 국제 현안에 대한 모든 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 핵심은 헤게모니(hegemony)에 대한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합의문에는 “중국은 초강대국이 되지 않을 것이며, 패권(헤게모니)이나 그 어떤 권력 정치에도 반대한다. 중국과 미국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패권(헤게모니)를 추구해서는 안되며, 특정 국가 혹은 특정 국가의 그룹이 패권(헤게모니)를 추구하는 노력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All nations, big or small, should be equal: big nations should not bully the small and strong nations should not bully the weak. China will never be a superpower and it opposes hegemony and power politics of any kind.

The Chinese side stated that it firmly supports the struggles of all the oppressed people and nations for freedom and liberation and that the people of all countries have the right to choose their social systems according their own wishes and the right to safeguard the independence, sovereignty and territorial integrity of their own countries and oppose foreign aggression, interference, control and subversion.

(syncopation)


With these principles of international relations in mind the two sides stated that: progress toward the normalization of relations between China and the United Stateㅁs is in the interests of all countries both wish to reduce the danger of international military conflict neither should seek hegemony in the Asia-Pacific region and each is opposed to efforts by any other country or group of countries to establish such hegemony neither is prepared to negotiate on behalf of any third party or to enter into agreements or understandings with the other directed at other states.



이 합의문에는 미중(美中) 간의 관계뿐 아니라 일본, 베트남은 물론, 라오스, 캄보디아, 파키스탄과 인도, 인도네시아에 대한 사항도 있었고, 한반도에 대한 사항도 있었다.

한반도에 대한 합의 사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합의문에는 북한이 제안한, “남북연방제 수립을 위한 대남 제안 8 개항”을 미국과 중국이 강력히 지지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 제안은 1971년 4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 4기 5차 회의에서 북한 외상 허담이 “현 정세와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시킬데 대하여”라는 보고를 통해 제안한 것이다.

It firmly supports the eight-point program for the peaceful unification of Korea put forward by the Government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on April 12, 1971.

그 8개 항은 다음과 같다. 1) 미군철수 2) 10만 이하로의 감군 3) 한미상호방위조약 등 민족의 이익에 배치되는 조약의 폐기 4) 남북총선거 5) 각 정당·사회단체의 활동 보장 6) 과도적 조치로서 남북연방제의 실시 7) 광범위한 교류의 실시 8) 이상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남북정치협상회의 개최.

닉슨 대통령은 69년 한미정상회담에서 미군 철수는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71년 휴전선을 지키던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시켜 버린데 이어, 72년 상하이 코뮈니케 발표 이후 나머지 미군 철수를 논의했고, 한국 정부에는 북한이 제시한 8개항을 받아들이라는 압박을 했다.

동맹국이라고 생각했던 미국이 등을 돌리자, 국가안보 위기를 느낀 박정희 대통령은 같은 해인 72년 10월 계엄령을 내리고 국회를 해산한 후 유신헌법으로 대응했다.






유신 헌법은 국민투표로 결정되었는데, 유권자의 91.9%가 투표에 참여하여, 91.5%가 찬성했다.

상하이 코뮈니케에는 ‘하나의 중국(One China)’에 대한 조항도 들어 있다. 즉,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이며, 대만은 중국에 속한 지역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고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대만 총통과 통화한 것이 얼마나 중국을 자극했는지 이해되는 대목이다. 이 선언 이후 미국은 대만에 있던 미군을 철수했고, 대만과 사실상 단교했다.

상하이 코뮈니케에 패권주의를 반대하는 내용이 반복되어 들어간 건, 중국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당시에는(!) 패권주의에 반대하였다. 스스로는 패권을 펼칠 역량이 되지 않는데, 미국과 소련, 일본 등 강대국이 중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불만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같은 해인 72년 9월 북경에서는 중일 공동 성명도 있었는데, 여기에도 “중국 일본 양국은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패권을 추구하지 않으며, 패권을 확립하려는 여하한 국가의 시도에도 반대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1974년 국제연합에서 연설한 덩샤오핑은 다음과 같이 반패권주의 입장을 천명했다.


“중국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초강대국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중국이 어느 날 낯빛을 바꿔 초강대국으로 변하고 세계에서 패권국가를 자청하며 곳곳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모욕하고 침략하고 수탈한다면 세계 인민들은 마땅히 중국에게 사회제국주의라는 모자를 씌워야 하며, 그 사실을 폭로하고 반대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인민들과 함께 그것을 타도해야 할 것입니다.”


1973년 8월 중국 제10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미-소 양 초강대국의 패권주의에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발언하였으며, 75년 1월 제정된 중국의 신헌법에는 아예 “중국인민 및 중국인민해방군은 제국주의와 패권주의의 침략 파괴 및 무력도발을 물리치고 국가의 독립과 안전을 지키고 국방을 강화하였다.”는 내용과 “반제국주의 반패권주의, 반식민지주의를 견지하며 세계 여러나라 인민들과 단결을 강화하고 피억압민족과 개발도상국의 민족독립의 획득 유지 및 민족경제 발전을 위한 정의의 투쟁을 지지하며 세계평화를 확보하여 인류의 진보를 촉진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달라진 중국 외교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잡을 당시만 해도 소련은 중국을 동유럽 위성국가처럼 취급했다. 중국은 1950년 중소(中蘇) 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 체결을 통해 소련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그 댓가로 소련은 만주의 주요 항구와 철도 운영권을 요구했다. 중국은 그런 소련에 NO라고 반발하지 못했다.

1970년대까지 미국은 대만에 무기를 팔았고, 대만에 미군을 주둔시켰지만, 중국의 반발은 바람처럼 가벼웠다.

중국은 아직 목소리를 낼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분을 삼키며 덩샤오핑의 가르침인 도광양회(韜光養晦)할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이 미국을 상대로 ‘NO’라고 한 첫 사건은 91년에 발생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 칼라 힐스(Carla Hills) 대표가 미중 간 지적재산권 협상을 위해 우이(吳儀) 대외경제무역부 부부장과 마주 앉았을 때, 중국 내 불법복제를 겨냥해 “우리는 좀도둑과 협상하러 왔다”고 독설을 내뱉자, 우이는 “우리는 강도와 교섭하고 있다. 미국의 박물관을 둘러보라, 중국에서 약탈해간 유물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매섭게 되쏘아 붙였던 일화가 있다.








우이 부부장은 2003년 여성 최초의 중국 부총리가 되었는데,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회담을 위해 방일한 후, 그 전날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후, “전몰자 추도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는 다른 나라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라는 발언을 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회담을 취소하고 귀국해 버리기도 했다.

이런 배짱은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중국 외교 기조에서 벗어난 것이지만, 중국 인민들과 언론의 찬사를 받았고, 우이는 철낭자 (여걸)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97년 장쩌민(江澤民) 주석은 “대국으로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겠다”고 선언했다. 책임대국론(責任大國論)이며, ‘필요한 역할은 한다’는 ‘유소작위(有所作爲)’로의 변신이었다.






2010년 중국 감옥에 갖혀있던 인권 운동가 류샤오보(劉曉波)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하자, 중국 정부는 17개국 100 여개 단체를 동원해 노벨상 시상식을 보이콧하며 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센카쿠(尖閣) 열도 영유권 분쟁 때에는 희토류 수출 중단, 간첩혐의 일본인 억류 등 무차별 공세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도 했다.

2013년 시진핑이 중국 주석이 된 이후 중국의 외교 기조는 더욱 강경해져, 도광양회(韜光養晦), 유소작위(有所作爲)를 넘어서, 주동작위(主動作爲 할 일을 주도적으로 한다)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주동작위는 중국 외교부가 만드는 주간지 ‘세계지식(世界知識)'이 제시한 개념이다.

주동작위의 대표적인 것은 2013년 동중국해에 방공식별구역(China ADIZ)을 선포한 것이다. 방공식별구역 선포는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직접 결정한 사안으로 알려져 있다. 시진핑 주석은 2012년 12월 공산당 정치국 제3차 전체 학습에서 "중국 외교가 세계 규칙의 추종자(追從者)에서 세계 규칙의 제정자(制定者)로 변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이런 주장도 있다. “세계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는데, 하나는 글로벌 스탠다드이며, 다른 하나는 차이나 스탠다드이다.” 이는 세계의 규칙을 중국이 만들겠다는 이야기이며, 그리도 소리 높혀 외쳤던 반패권주의를 버리고, 패권 국가가 되겠다는 이야기이다.

중국이 주도해 만든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역시 중국 패권주의의 단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미국 등의 선진국이 주도하는 국제 통화 기금(IMF), 세계 은행 (World Bank), 아시아 개발 은행(ADB)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AIIB를 만드는 건,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 미국과 패권 전쟁을 벌이겠다는 것과 같다.

현재, 미국, 일본 등 5개국을 제외한 G20 국가들과 EU회원국의 절반 등 57 개국이 가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一带一路, 신실크로드) 계획도 중국의 패권주의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대일로(一带一路)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연결하는 육상 실크로드 경제권을 뜻하는 ‘일대(一带)’와 아세안 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중국, 동남아,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해양 실크로드를 의미하는 ‘일로(一路)’를 합친 말이며, 시진핑 주석이 1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과제인 지역경제 발전의 실천방안으로 추진 중이다.







일대일로에 관계한 국가는 무려 60개국이며, 전체 인구의 63%에 해당하는 44억명에 달한다. AIIB와 일대일로가 결합하면, 관련국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중국의 상품을 유럽과 아프리카로 보낼 수 있다.

중국이 패권 국가로 변모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여러 가설이 있지만, 강대국의 위세를 보이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중국이 위기를 느끼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10%에 이르던 고도 성장이 둔화되었고, 무엇보다도 지속적 개발을 위해서는 자원 확보의 필요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 아프리카 등 제 3국가들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이유 역시 자원 확보 차원이라는 것이다.

중국 건설사들은 아프리카 등지의 도로 건설 등 별로 돈이 안되는 인프라 사업에도 손을 대는데, 이들은 도로를 깔기보다는 미개발 오지의 토질 조사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 리비아에서 차드로 이어지는 도로 공사 중 지질 조사(지하자원 탐사)를 하다가 리비아 정부로부터 계약을 파기당하고 쫓겨난 사례에 대한 루머도 있다.

이들 모두 자원 확보를 위한 변칙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피하기 어려운 패권 전쟁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을 고립주의로 회귀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미국의 고립주의는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 이임사에서 주창한 것이며, 미국의 이익을 위해 유럽 강대국들의 싸움에 끼어들지 말고 중립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이후1823년에는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유럽 대륙의 문제에 대한 불개입, 유럽 열강에 의한 미주 대륙 국가들에 대한 간섭이나 이들 국가들의 식민화 반대한다는 먼로 독트린을 발표한 바 있다.

미국의 고립주의는 미국 국력의 신장과 함께 1차,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면서 종식되었으며, 실질적으로는 달러화가 전세계 기축화폐로 자리잡음으로써 미국은 더 이상 고립주의를 고집하기 어려워졌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달러화 가치를 지키는 것이 바로 미국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며, 이를 위해 미국은 전세계 분쟁에 개입하여야 할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전세계 무역량의 약 64% 이상이 달러로 결제되고 있다. 그 뒤를 잇는 유로화는 20% 가량이며, 일본 엔화와 영국 파운드 화가 합쳐서 8.5% 수준이다.









또, 석유의 거래 대금은 US 달러로만 결제 한다. 이 같은 관행은 지난 1970년 대 OPEC에 의해 합의 되었으며, 석유 대금으로 지불되는 달러 머니를 petrodollars 라고 부른다. 

미국은 기축화폐국의 권력을 가지고 있을뿐 아니라 기축 화폐를 소유함으로 누리는 실질적 이득도 있는데, 바로 화폐주조 이익(Seigniorage effect)이다. 이는 화폐를 만들 때 생기는 이익(예를 들어 10센트를 들여 25센트 주화를 만들면 15센트의 차액이 생김)과 화폐가 자연 훼손됨으로 생기는 이익을 말한다.

실물 화폐의 경우, FRB(Federal Reserve Board of Governors)는 2009년 기준 전체 지폐의 약 36.7%인 $313 billion 달러(약 350조 원)가 해외에서 유통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유통되는 실물 화폐는 늘 증발(훼손, 소각, 망실 등등)하므로, 그만큼 화폐를 찍어 사용할 수 있다. 이 같은 화폐주조 이익(Seigniorage effect)은 기축통화를 가진 미국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위스콘신 대학의 Edgar L. Feige 교수 등이 1997년 계산한 시뇨리지는 지난 1964년 이후 20년간 약 $167~$185 billion 달러(약 185~210조 원)이며 연간 평균 70 억 달러(8조 원) 가량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추정컨대 미국은 연간 100 억 달러 정도의 시뇨리지를 누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이 같은 유형의 이득뿐 아니라 무형의 이득을 계산해 국제 사회에 공헌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중국이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넘어서 주동작위(主動作爲 할 일을 주도적으로 한다)를 표방하고 지역 권력(regional power)을 넘어서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경우, 중국과 미국의 충돌은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남중국해에서 여러 차례 충돌할 뻔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이건 가벼운 스파링에 불과하다.

다음 달 초, 즉 4월 초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과의 한 판 승부가 있을 예정이다. 

그 둘의 설전 무대는 플로리다가 되겠지만, 실전 무대는 한반도가 될 것이다. 
과연 한반도는 미국 중국의 패권 전쟁에 대비하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2017년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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