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모르는 캐나다 의사의 특권








만일 신장 기능이 떨어져, 투석 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이 닥쳤을 때, 당신에게 의사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환자분은 몇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투석받는 것을 포기하고 보존적 치료를 받는 것입니다. 보존적 치료란, 증상 치료만 하고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추측컨대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다가 의사가 농담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 순간,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병원을 나와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캐나다 병원의 신장내과에서는 흔히 발생한다.

‘캐나다 신장학회’, ‘캐나다 신장 간호사 및 기사 협회’, ‘캐나다 신장 사회사업가 협회’, ‘캐나다 신장 재단’은 말기 신부전환자에게 투석을 강제하는 대신, 투석받지 않는 치료 즉, 보존적 치료를 권장하는 것을 정책 기조로 하며, 이를 설명하기 위한 브로셔를 제작하여 병원에 비치해 둔다.

이 브로셔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당신은 어떤 신부전 치료를 받을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즉, 투석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신장 기능이 일정 수준이하로 떨어지면 투석을 필요로 하지만, 투석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며, 이를 선택할 경우, 건강은 계속 나빠지고 결국 사망하게 된다.”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만성 신부전 환자에게 투석받지 말고 죽음을 받아들이라니…

“왜 내가 투석치료를 시작하지 말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한다.

“말기 신부전 환자에게 건강상 문제가 있다면, 투석으로는 이 문제를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투석을 받지 않는 것은 자살이 아닌가” 라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NO”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투석을 받지 않은 것은 선택적 치료(treatment choice)로 캐나다 보건의료 표준에 속한다고 말한다.

또, 투석을 받지 않겠다고 의사에게 말하면, 죽어가는 과정에 대해 의사와 상담할 수 있으며, 원하면 병원에서, 혹은 집에서 사망할 수 있고, 사망하기까지 의료팀이 지켜봐 줄 것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투석을 받지 않아 사망할 경우, 장기 공여를 할 수 있는 방법 등 많은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처음 이 브로셔를 접하고 한동안 혼란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사실 지금도 이 브로셔를 보고 내가 내린 결론이 맞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

내가 내린 결론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좀 높은 수준에서 말하자면, 말 그대로 환자에게 말기 신부전 치료 방법을 알려 주고 이에 대한 선택권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이런 방법도 있다는 걸 알려주려는 것일 뿐, 반듯이 이것을 선택하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좋은 쪽으로 합리화하기에는 브로셔가 지나치게 상세하고, 심지어 투석을 받지 말라고 유도하는 듯한 인상도 준다.

또, 좀 낮은 수준에서 말하자면, 결국 의료비 문제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만성신부전 환자는 평생 투석을 받아야 하며, 이는 캐나다 정부의 의료비 지출에 막대한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의료비 문제로 병상을 줄이고, 응급실을 폐쇄하는 캐나다라면 불가능한 상상도 아니다. 따라서 투석으로 고통받느니, 적당한 선에서 삶을 ‘아름답게’ 포기하는 것도 생각해 보라고 권유하며 ‘환자의 선택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의료 공급자의 목을 조여 의료비 지출 통제를 해서는 안되며, 의료 소비를 통제하는 방법을 써야 한다고 여러 차례 주장한 바 있는데, 캐나다(비단 캐나다 뿐 아니라, 대부분의 NHS나 국영의료를 선택하고 있는 국가)는 의료 소비를 강력히 통제하여 의료비 지출을 줄이는 전형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캐나다는 우리나라 좌파들이 염원하는 무상의료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고난도의 고급 의료서비스까지 모두 무상 치료 받을 수 있다. 캐나다 의료 수준은 결코 우리나라에 비해 떨어지지 않을 뿐더러 월등히 나은 분야도 많이 있다.

또, 국가는 국민들에게 다 공짜로 치료해 준다고 선언한다. 다만, 빨리빨리 안 해 줄 뿐이다. 의료서비스를 기다리거나 말거나의 문제는 환자에게 달려 있다. 무상으로 치료받고 싶으면 계속 기다려야 하고, 그게 싫으면 미국이나 멕시코로 가서 치료를 받으면 된다.

캐나다 미국 국경, 미국 멕시코 국경 인접 도시에는 이렇게 기다림에 약한 환자들을 위한 의료시설이 넘쳐나도록 풍족하며, 돈만 내면 원하는 의료서비스를 언제든지 받을 수 있다.

굳이 미국이나 멕시코까지 가기 싫다면, 물론 제한적이긴 하지만, 캐나다 병원에 직접 돈을 내고 빨리 검사를 받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MRI는 대략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하지만, 현금을 들고가면 바로 그 자리에서 찍을 수 있으며, 불법도 아니다.

캐나다 의료 시스템은 폄하 하자는 것은 아니다.

많이 기다려야 한다고 반복해 이야기하니, 정말 급하고 중한 환자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오해이다. 뒷부분에 OECD 통계를 통해 언급하겠지만, 캐나다 국민의 외래 이용 빈도는 OECD 평균 이상이며, 위에서 언급한 말기 신부전 환자의 신장 이식 건수는 인구 10만명 당 3.8회로 우리나라 (3.5회)보다 캐나다가 더 많다.

사실 캐나다 환자는 일단 ‘레일에 올라타기만 하면’ 매우 쾌적하고 훌륭한 치료를 기분 좋게 받을 수 있다. 다만, 레일에 올라타기까지가 어려울 뿐이다. 보통 중환일수록 레일로 가는 길이 더 쉽고, 가벼운 질환은 레일 근처에 접근조차 어렵다.

그래서 성격 급한 한국 교포들은 종종 (캐나다에 비해) 의료 소비자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캐나다에서는 얼굴 보기 힘든 전문의들이 한국에서는 발에 차이도록 넘쳐 난다. 캐나다에서는 몇 달을 기다려야 받을 수 있는 비응급 수술도 한국에서는 몇 일이면 받을 수 있다. 게다가 한국에서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본인 부담금을 지불 했어도, 캐나다 주 정부에 크레임을 걸어 상당 부분 돌려 받을 수도 있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하는 것이다.

지난 해, Gerd Trubenbach라는 캐나다 노인의 이야기가 매스컴에 올랐다.







그는 캐나다 서부 BC주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목에 8 cm 크기의 악성 종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종양을 진단받은 지역 병원의 의사로부터 “더 해 줄 것이 없다”는 선언을 듣고 병원에서 퇴원해야 했고, 암 전문 병원의 종양 전문의를 만나기 위해 두 달 이상 기다려야 했다.

기다림에 지친 그의 부인인 Naomi Kim은 마침 한국 사람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데리고 한국으로 날아와, 경북대 병원에서 12시간의 수술을 받았다. 한국 도착 당시 종양의 크기는 이미 두배로 자라 20 cm 에 이르렀다. 수술 의사는 초기에 BC 주에서 좀 더 빨리 수술을 했다면 좀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 것이라고 당연한 말을 했다.

경북대 병원에서 Gerd의 종양은 4 기 악성 종양으로 진단되었다.

자,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이렇게 요약된다.

“악성 종양을 가진 71세 캐나다인은 캐나다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기다리다가 기다림을 참지 못해 부인의 덕에 한국에 와서 빨리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캐나다 노인의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언론에 공개되었고, 캐나다 주류 미디어인 CBC 에서도 보도되었다.

당시 이 노인의 가정의(주치의)는 인터뷰를 거절했고, Health Authority는 종양 전문의의 예약이 재조정 된 이유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다만, 대변인은 “우리는 전문의의 특권(privileges)에 문제가 없었다고 확인해 줄 수 있다”며, “예약은 재조절될 수 있으며, 환자들은 다음 약속을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이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가 말한 전문의의 특권이란 이런 것을 의미한다. 즉, 내가 어느 환자를 보는데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할 권리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다음 환자가 늦어지는 건 별개의 이야기이다. 또, 내가 환자를 보기 위해 집중할 시간이 필요해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 이게 모두 전문의의 특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다른 환자가 늦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기다리는 많은 환자를 고려해 1,2 분 간격으로 외래 진료를 하고,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를 위해 컨베이어 시스템 돌리듯, 수술 공장을 돌리는 우리나라 의사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어느 환자의 생존 가능성을 판단하고, 수술을 하거나 포기하는 것 또한 그 전문의가 가진 특권이다. 대신 환자에게는 “선택권”이 보장된다. 그 선택권은 의사를 선택할 권리가 아니라, 기다리거나 안 기다릴 권리, 치료받거나 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이 역시 의사를 쇼핑 채널 돌리듯 골라 잡을 수 있는 우리나라 환자로써는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니, 당신은 이 대변인의 말에 동의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은행이나 주민센터 같은 곳을 찾아가 뭘 묻고 싶으면 창구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직원에게 선뜻 질문을 던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그건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 직원은 돈을 세거나, 계산을 하거나, 컴퓨터로 자기 업무를 하고 있었을 것이며, 그 직원은 자기 업무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또는 집중해 일을 하기 위해 막간을 이용해 커피를 마시고 있을 수도 있다.

심지어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더라도 그 직원이 자기 일을 마칠 때까지 “고객”님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 직원이 자기 업무 (커피 마시는 것도 포함한다)를 마치고 고객을 응대할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것이야말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고객이 창구로 달려가 뭘 묻는데 쳐다보지 않거나 기다리라고 하거나, 혹은 계속 커피를 마시고 있다면, 우리나라의 그 고객 님은 “고객이 왕인 걸 모르냐”며 당장 소리를 지르며, 윗 사람 불러 오라고 난리를 부릴 것이다.

그러나 캐나다의 시청이나 공공기관, 은행, 심지어 작은 맥도널드나 팀 호튼 같은 도넛 가게의 점원도 이런 식으로 불쑥 얼굴을 내밀며 주문을 하거나 무언가를 물어보면 아무리 왕인 고객이라도 무시하거나 경멸한다. 지금은 워낙 한국 사람, 중국 사람이 많아 이런 경멸할만한 태도에 익숙해졌겠지만 말이다.






그 대변인의 말은, 기다리거나 기다리지 않는 건 환자의 선택일 뿐, 캐나다 의료시스템에는 문제가 없으며, 의사에게도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이고, 왜 이런 걸 묻느냐는 것이다. Gerd의 주치의 역시 인터뷰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기사를 보면, Gerd는 우리나라 건강보험 혜택을 받은 듯 하고, 비보험일 경우 지불해야 할 15만 달러의 진료비 중 8천 달러만 냈다고 쓰고 있다. 기사가 실린 2015년 5월 경 캐나다 환율로 따지면, 비보험 진료비 1억 2천만원 중 6백 4십만원을 낸 것이다. 이것이 합당한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

어쨌든 그는 이렇게 부담한 6백 4십만원을 BC 주 의료보험 (MSP)의 OUT-OF-PROVINCE BENEFITS 규정에 따라 돌려받았을 것이다.

이 두 사례, 즉, 말기 신부전 환자에게 투석을 거부하고 서서히 죽어가는 방법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과 말기 암 치료를 기다리지 못해 한국에 와서 수술하고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캐나다로 돌아간 노인의 사례를 놓고 debate할 이야기들은 참으로 많다.

단순히 캐나다 의료시스템이 좋은가, 한국 의료시스템이 좋은가 하는 단세포적인 질문은 하지 말자.

굳이 답하자면, 의료 공급자의 입장에서는 캐나다 의료시스템이 백만배는 더 좋다고 할 수 있다. 캐나다 의사들의 소득 수준이 더 뛰어나고, 더 안정적 생활을 할 수 있으며, 완벽한 노후 대책을 준비할 수 있고, 합리적인 근무시간 때문이 아니다.

의사가 좀 더 의사 답게 대접받기 때문이다.

캐나다도 Malpractice에 대해 제재를 가하지만, 캐나다 의사가 의료 행위의 결과로 형사 처벌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만일 노골적인 실수에 의해 환자가 사망했다 해도, 악의적으로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면, 의사 협회가 의사를 소환해 재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하도록 하는 것이 전부이다.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복잡한 인체를 다루는 의사에게는 더 많은 실수가 있을 수 있으며, 그 결과에 대한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 실수를 줄여나가는 프로그램이 더 중요하다는 철학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명찰을 달지 않았다고 처벌하고, 설명을 제대로 안 했다고 과태료를 물리고, 기타 등등 의사의 일거수일투족을 법령과 고시로 묶지 않는다. 의사의 행위를 간호사가 심사하고 적정한지 평가하는 건 상상도 못한다.

또, 캐나다 의사는 환자 입장에서 보면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어 환자가 의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환자를 얼마나 서둘러 진료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권이 주치의와 전문의의 판단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고통을 호소해도 주치의가 전문의 진료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더 길어진다. 주치의는 환자에게 전문의를 만날 필요가 없다고 직접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한없이 기다리다 저절로 좋아지거나 아예 포기하기 때문이다.

전문의도 마찬가지여서 검사나 수술의 완급을 전문의의 재량에 따라 정할 수 있다.

그러니 환자가 주치의를 찾아가 성질을 내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자기한테 돌아올 불이익을 안다면 말이다. 최근 중국이나 인도, 중동 등지의 이민자들이 늘면서 이런 암묵적 규칙이 깨지고 있어, 아예 이런 환자들을 받지 않는 서양 주치의들도 많다.

아무튼 환자는 진료비를 내지 않는 대신, 의사나 병원의 안내와 지시를 철저히 따라야 한다. 진료실에 들어오면서 ‘나 감기인데, 링거좀 놔주세요’라며 편의점에서 사이다 사 먹듯 진료받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중국집에서 짜장면 시키고 단무지 모자라다고 투덜대는 것처럼, 감기인데 주사 안 놔준다고 투덜대는 일도 없다. 물론 감기로 아파서가 아니라, 아플까봐 미리 의사를 찾는 것도 상상할 수 없다. 왜냐면 주치의를 만나고 싶다고 아무 때나 만날 수 없으며 전화로 예약하고 적어도 2 주는 기다려야 만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좌파, 시민단체는 무상 의료를 하자고 덤비지만, 이렇게 할 수 있으면 한번 해보자. 단, 캐나다 수준으로 의사들을 대접할 수 있다면 말이다.

캐나다의 의료 이용이 이렇게 불편하고, 심지어 암 수술을 기다리다가 죽어야 할 판이고, 만성 신부전 환자는 투석받지 말라고 권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캐나다인의 건강 상태는 어떨까?

어느 나라의 Health status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OECD의 몇 가지 지표를 보자. ( ) 안은 OECD 평균 값이다.

2013년 기준, 캐나다의 남여 평균 기대 수명은 81.5 년이다. 한국은 81.8 년으로 크게 차이없다. (80.5 년)
캐나다의 영아 사망율은 출생 1천명당 4.8 명이었고, 한국은 3.0 명으로 높은 편이었다. (4.1 명) 영아 사망율이 높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추정컨대, 분만 전 미리 “걸러내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즉, 태아에게 문제가 있거나 설령 기형이라도 분만하려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음은 인구 10만명 당 통계이다.
캐나다의 암 사망율은 207.5 명이었고, 한국은 183.3 명이었다. (205.4 명)
캐나다의 뇌혈관질환 사망율은 37.8 명이었고, 한국은 76.5 명이었다. (66.0 명)
캐나다의 허혈성 심질환의 사망율은 95.2 명이었고, 한국은 43.2 명이었다. (116.9 명)
캐나다의 호흡기 질환 사망율은 63.4 명이었고, 한국은 75.3 명이었다. (67.3 명)
캐나다의 자살 사망율은 10.5명이었고, 한국은 29.1 명이었다. (12.0 명)

우리나라 암 사망율이 적은 것은 암 정책 탓이라고 본다. 즉, 암 환자의 본인 부담율을 5%로 낮추자 각 대학, 대형 병원들이 경쟁적으로 암 병동을 짓고 암 환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암전문 수술 의사는 대폭 늘었고, 그 대신 외상 전문의는 대폭 줄었다.

캐나다의 건강 지표 중 암 사망율의 경우만 OECD 평균보다 높을 뿐 대부분 낮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의료 자원 측면에서 보면,
캐나다는 인구 1천명 당 2.7 병상을 가지고 있는 반면, 우리는 11.0 병상을 가지고 있고, 급성기 병상의 경우 캐나다는 1.7 병상을 가지고 있으나 우리는 6.2 병상을 가지고 있어, 캐나다와는 비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OECD 평균 3.3 병상의 두 배에 달한다.

임상 의사의 수는 캐나다 2.5 명, 한국 2.2 명/인구1천명 당으로 비슷한데, 간호사는 캐나다 9.5 명, 한국 5.2 명으로 크게 차이가 난다.

또, CT의 경우 한국이 2.56 배 많고, MRI는 2.78 배 많다.

한편, 국민 1인당 캐나다는 평균 7.7 회 외래를 방문하고, 한국은 14.6 회 방문한다. OECD 평균은 6.8 회이다. 즉, 우리나라 국민은 다른 나라에 비해 두 배 많게 외래를 찾는 것이다.

의료비 지출은 캐나다가 GDP의 10.2%를 의료비로 썼으며, 한국은 GDP의 6.9%를 썼다.

즉, 한국은 의사 수는 적은데 비해, 외래 방문, 입원 일수가 OECD 평균의 두 배에 달하고, 덩달아 병상 수도 두배가 더 많다. 그럼에도 의료비 지출은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 바꿔 말하면, 의사의 업무 로딩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많고 소득은 적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의료의 외래/입원 등 이용율은 다른 나라의 두 배에 달하는데, 우리나라 국민 중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35.1 %에 불과하다. 캐나다 국민 중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88.7 %이었다.






한마디로 캐나다는 효율적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우리나라는 방만한 의료 이용을 보이고 있으면서도 건강에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 건강 지표를 보면 그렇지도 않은데 말이다.

다시, Gerd Trubenbach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Gerd의 기사는 수술 받은 2015년에 실렸는데, 그 이후의 그의 상태가 궁금해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지만, 더 이상 그의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가 여전히 건강하게 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기사만으로는 그의 종양의 정체를 알 수 없지만, 4기 암 즉, 다른 곳에 이미 전이되어 있다면, 생존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왜 Gerd의 주치의와 그 지역 병원은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다고 했을까, 왜 종양 전문의는 서둘러 그 환자를 보지 않았을까.

만일 같은 증상을 가진 우리나라 환자 즉 크기가 8 cm ~ 20 cm에 달하는 4기 경부 종양 환자가 병원에 왔다면, 역시 선뜻 수술하자고 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환자와 보호자가 수술을 원하고, 어느 정도 종양 크기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예후에 관계없이 수술했을 재주 좋은 의사들이 있었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렇게 수술하는 것이 미칠 환자의 삶의 질이나, 남은 여생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판단을 보류한다면 말이다.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무엇이 좋은 선택이었는지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캐나다의 Gerd의 주치의나 지역 병원은 수술하지 않는 것이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수술하지 않은 캐나다의 의사나 병원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그 의사들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캐나다의 차이는 여기에서 극명하게 갈린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의사에게 그런 특권은 매우 협소하기 때문이다. ‘죽어도 좋으니 수술해달라’고 하면, 의사의 선택은 더욱 좁아진다.

분명한 사실은 Gerd의 예를 놓고 캐나다 의료 제도를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한국 의사의 특권에 대한 것이다.

의사의 특권은 의사가 편하려 하고, 의사가 환자에게 갑질하자는 특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료의 완급을 조절하고, 환자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의사의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미 한국에서는 의사의 특권 따위는 사치일 뿐이다. 이미 의사는 단순 서비스 종사자일 뿐이다. 그런데, 한국 의사의 격이 추락하기 시작한 건, 환자 단체나 환자들 때문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응급실 환자는 5 분 내에 진료해야 한다고 압박하고, 1, 2분 사이에 환자를 진료하도록 살인적인 외래 스케쥴을 잡고, 매출로 의사를 평가하고, 백화점에서 하듯 친절 교육을 강조하고, 전공의를 오더리 취급하고, 비합리적 의사 윤리, 자율 징계 따위를 거론하는 선배 의사, 병원, 의사 단체 등 우리 스스로가 그랬던 것이다.

거기에 의사를 애 취급하며 법과 고시로 일거수일투족에 족쇄를 채우는 국회와 보건복지부는 덤일 뿐이다.


2016년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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