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의 의식화 과정












어떤 사안이 있다.

1. 대중의 일부는 그런 사안이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
2. 다른 일부는 그 사안에 관심을 가진다.
3. 다른 일부는 그 사안에 집착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한 두 마디 한다.
4. 또 일부는 그 사안이 밥줄이라 그걸로 먹고 산다.


이 사안에 ‘특정 법’을 대입해 볼 수 있다. 환경법, 국가보안법 따위 말이다.

국가보안법이라면 내 경우 2에 속한다. 이런 법이 있다는 건 알지만, 크게 관심이 없다. 내가 그 법을 어길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의료법이라면 3 에 속한다. 4 였던 적도 잠시 있었다.

또, 이 사안은 법이 아니라 ‘정책’일수도 있다.

대부분의 민초들은 정책에 문외한이다. 그나마 시행되는 정책은 법에 근거하므로 법을 보면 가늠할 수 있지만, 입안되고 있는 정책은 더 알기 어렵다. 그저 언론에 보도되는 정도로만 안다.

의사들은 대부분 1의 상태로 의사가 된다. 수련받는 동안에도 대부분 1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럴 겨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전문의를 따고, 취업하거나 개업을 하면 슬슬 2의 상태가 되고, 어느 덧 3이 된다.

대한민국에서 의업을 하려면 의료법, 국민건강보험법 정도는 반듯이 숙지해야 하고 그외에도 여러 법들과 시행령, 시행규칙을 꼼꼼히 알아야 하지만, 의료법 조차 통독해 본 의사는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그 행간의 의미(입법 취지)를 이해하고 제대로 해석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다 개인 자신에게, 혹은 소속 병원이나, 소속 의사회 등등에 어떤 계기가 생기게 되면 비로소 3의 상태가 되기 위해 자료를 찾아 보고, 모임에 나가기 시작한다.

어느 덧 우리나라 의료제도와 건강보험제도가 얼마나 엉터리이며 불합리한지 알아차리게 된다.이걸 자각의 과정 즉, ‘의식화’라고 부르자면, 우리는 지난 의료계 역사에서 (예를 들어) 피부과 의사회, 안과 의사회 등이 어떻게 ‘의식화’의 과정을 겪어왔는지 보아왔다.

의식화 되면 일부는 3의 과정에 머물고, 일부는 아예 생업을 버리고(?) 4의 과정에 들어선다.

그럼 이들은 자신이 알게 된 불합리한 사실에 대해 분노하며 “이럴 수는 없다며” 문제 제기하기에 급급해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1 에서 3 혹은 4의 과정을 겪는 모든 의사들이 똑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비로소 알아차리게 된 부당한 제도에 대해 똑같은 문제 제기를 반복적으로 할 뿐, 문제 해결의 강을 건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미 3 혹은 4의 상태에 있는 의사는 이들, 즉 3 혹은 4의 과정에 들어서며 흥분하는 의사들을 보고 슬그머니 미소 짓는다. 아마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 해서 그럴 것이다. 의식화된다는 건 반가울지 몰라도 중언부언일 뿐이다.

둘째는, 이 과정이 4 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5 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5는 다음과 같다.

5. 일부는 그 사안을 빌미로 개인의 영득을 추구한다.

5의 상태에 있는 자들은 두 부류이다.

하나는 여전히 1 혹은 2의 상태에 있는 수 많은 의사들을 선동하는 자이며, 다른 하나는 정부, 공단, 시민 단체라는 거대한 상대와 맞서 본 후, 3의 과정에서 그렇게 목소리 높여 외쳤던 제도 개선이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며 스스로 무릎을 꿇는 자이다.

이 자들은 공히 의료 제도, 보험 제도 개선이라는 본질은 외면한 체 자신의 영달과 개인의 영득을 취하는 것에 급급해 하는 자들이다.

지난 20여년간 의료계에 몸 담으며 5의 상태에 이른 자들을 숱하게 보아왔다. 전현직 의협회장, 전현직 국회의원 중에도 이런 자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문제 제기만 하는 집단,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집단,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이 상황을 이용하는 집단이 한국 의료계인 것이다.

몇 달 뒤, 의협 회장 선거가 있다. 자천 타천 후보 들 중에는 3의 상태, 4의 상태, 5의 상태에 있는 자들이 보인다.

이들에게 무슨 대안과 결기가 있는지 궁금하다.


2018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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